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 애니메이션/역사 (문단 편집) === 개인 창작의 시대 === [[일본]]에 애니메이션 영화가 처음 소개된 건 1914년인데, [[영국]] 애니메이션 이 '개구장이 신화첩(凸坊新畫帖)'으로 소개되었다. 1916년경에 당대 인기 만화가 시모가와 오텐(下川凹天, 1892~1973)[* 본명은 시모카와 사다노리(下川貞矩). 시모카와 헤코텐이라고도 하며, 1892년 5월 19일 오키나와현 미야코 섬에서 초등학교 교장이던 시모카와 사다후미의 아들로 태어나 1898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머니를 따라 외가가 있는 가고시마현으로 옮겨 어린 시절을 보냈고, 1900년 군인이던 백부 이시바시 마사히토를 따라 도쿄로 상경했다. 1906년 코지마치 소학교 졸업 후 만화가이자 만화잡지 <도쿄 퍽>의 창간자 기타자와 라쿠텐(1876~1955)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만화 수업을 받았고, 1907년 스승 라쿠텐의 추천으로 아오야마 학원에 입학했으나 성적 부진으로 1년만에 퇴학당했다. 이로 인해 라쿠텐 문하에서 쫓겨났음에도 육군성 육지측량부에서 일하며 만화를 스스로 익혔고, 1912년에는 스승 라쿠텐이 새로 창간한 <라쿠텐 퍽>에 들어가 1916년 <펀치 초상(ポンチ肖像)>으로 데뷔했다.]이 영화사 덴카츠의 의뢰를 받아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관련 지식이 전무한 상태로 시행착오 끝에 1917년 1월 <개구쟁이 신화첩 무쿠스케 멧돼지 사냥 이야기(凸坊新畫帖 芋助猪狩の巻)>를 제작했고,[* <키네마 레코드>나 시모카와 작가의 회상기 등에 따르면 <개구쟁이 신화첩 명안의 실패(凸坊新畫帖 名案の失敗)>와 동일 작품이라는 얘기도 있으며, 본작이 최초라고 당대의 여러 자료들을 가지고 최초라고 주장하는 연구가들이 있으나 명확한 확답이 없다.] 칠판 애니메이션 <문지기 이모가와 무쿠조 이야기(芋川椋三玄関番の巻)>를 1917년 4월 도쿄 아사쿠사 키네마클럽에서 개봉했다. 아쉽게도 현재 필름은 남아 있지 않으나, 당시 증언에 의하면 움직임은 부자연스럽고 캐릭터가 걷는 속도도 안정이 되지 않았음에도 기념비적 작품으로 보고 있다. 이후 시모카와는 작품 몇 개를 만들었지만 작화 도중 전등 투과광으로 시력이 안 좋아져 1919년에 출판만화계로 돌아가야 했다. 같은 해 5월 서양화가 기타야마 세이타로(北山淸太郞, 1888~1945)는 해외 애니메이션을 연구한 끝에 컷 아웃 애니메이션 <원숭이와 게의 싸움>을 도쿄 아사쿠사 오페라극장에 공개했고, 6월에 만화가 고우치 준이치(幸內純一, 1886~1970)[* 1886년 오카야마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가족을 따라 도쿄로 상경해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1905년에는 서양화가 미야케 콧키(1874~1954) 밑에서 수채화를 배우고 1906년부터 2년 간 다이헤이요 양화회 연구소에서 수련을 거쳐 스승의 소개로 기타자와 라쿠텐의 문하로 들어가 만화를 배우며 <도쿄 퍽>에서 정치만화를 그렸다. 1912년 이후 <도쿄마이유신문>, <요미우리 신문> 등지에서 주로 시사 풍자만화를 그렸다.]는 영화사 고바야시 상회의 발주를 받아 <무딘 검: 하나와 헤코나이 명검 이야기(なまくら刀 塙凹内名刀之巻)>[* 과거 영화수집가 스기모토 고로(1924~1987)가 35mm 버전을 소장했으나 1971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러나 2007년에 영상문화사 전문가 마츠모토 나츠키가 오사카의 골동품 시장에서 해당 작품의 필름 및 기타야마 세이타로의 <우라시마 타로(1918)>를 발견했고, 디지털 복원을 거쳐 2008년 도쿄국립근대미술관 필름센터에서 열린 특별전 '발굴된 영화들 2008'에서 공개됐다.([[https://www.youtube.com/watch?v=RNryy1uXEFU|유튜브 공개 영상]])]를 만들어 도쿄 아사쿠사 제국관에 공개했는데, 당시 평판은 상당히 좋았다. 기타야마는 닛카츠에서 독립해 '기타야마 영화촬영소'를 세워 주로 오락 및 교육작품을 계속 만들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애니 인프라 자체가 무너짐에 따라 조기 은퇴했고, 고우치도 스미카즈 영화제작사를 세워 제작을 지속했다가 1930년에 출판만화계로 복귀했다. 관동대지진 후 기타야마의 제자 야마모토 사나에(山本早苗, 1898~1981)와 기무라 하쿠잔(木村白山, ?~?), 그리고 무라타 야스지(村田安司, 1896~1966)가 정부로부터 발주받아 교육/관변 애니메이션을 제작했으며, 특히 무라타는 뛰어난 컷 아웃 제작실력을 바탕으로 모터 촬영기술을 활용해 다작을 하기도 했다. 고우치의 제자 오후지 노부로(大藤信郎, 1900~1961)는 1927년 '지요가미'라고 하는 일본 전통 색종이로 <마구다 성의 도적>을 만들고, 1929년에 일본 최초로 레코드식 발성 애니메이션 <검은 고양이>를 만들었다. 1932년에 실사영화계 출신 마사오카 겐조(政岡憲三, 1898~1988)는 최초로 광학녹음방식 셀 애니메이션 <남자와 여자세상>을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미국 애니메이션]]이나 <시오바라 다스케>나 <노인을 버리는 산>처럼 일본의 옛날 이야기나 우화에서 소재를 따온 것, 계몽적이고 교육적인 내용들이 주를 이루었다. 상당수는 전쟁 및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필름까지 사라졌지만 그래도 여럿 작품은 무사히 남아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yGvGMa2RFg|유튜브]]를 봐도 1920~30년대 일본 애니들이 올라와있는데 [[미국 애니메이션]] 영향이 큰 경우도 많다. 일본 애니 탄생 초기에는 너무 신기한 나머지 관객이 많았고 제작자에게 막대한 개런티가 주어졌으나, 1930년 들어 일본에도 발성영화 시대가 개막되고 디즈니 등 해외 애니메이션들의 무차별 상륙으로 점차 극장에서 퇴출당했다. 이미 분업제작 방식을 도입한 디즈니와 달리 일본 애니계는 전근대적 가내수공업이라 비싼 녹음설비나 기술혁신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고, 컬러화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행정기관 홍보 혹은 교육용 애니메이션을 수주하거나, 영화사로부터 실사영화 타이틀 등을 하청 제작해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